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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를 가장한

비현실적 풍경의 다큐멘터리

안소연(미술비평가)

 

 

 

 유독 늪지대나 숲의 풍경을 모노톤으로 캔버스에 담아온 윤예제의 회화는 사실적인 묘사와 심리적인 표상이 교묘하게 충돌하는 지점을 연출한다. 이는 그간의 전시 제목 《심연의 숲》(2013), 《짙은 품》(2015), 《어스름 속》(2016) 등만 보더라도 단번에 짐작해 볼 수 있다. 모순된 말처럼 들리겠지만, 그는 어떤 특정 풍경에 함의돼 있는 심리적 표상으로서의 사실적 형태에 깊이 몰두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화면 위에 묘사하기 위해 붓질에 매우 공을 들인다. 때문에 그의 무거운 모노톤 회화는, 그 사실적 묘사에도 불구하고 배경이 되는 특정 장소에 지나치게 몰입하지 않은 채 늪 또는 숲의 일반적인 모습을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 동시에 그 평범한 풍경 속에 내재돼 있는 수수께끼 같은 마술적 상상을 촉발시키기도 한다. 이처럼 윤예제의 “풍경” 회화는 다분히 양가적인데, 실제의 풍경에 다가가는 작가의 시선과 그 대상으로서의 시공(時空)을 경험하는 방식이 그러했고 사실적 묘사가 풍기는 비현실적 정서 또한 하나의 화면에서 묘한 아이러니를 만들어냈다.

 

풍경에 대한 내부자의 또 다른 시선

 

그림을 보고 있자면, 윤예제의 회화가 드러내는 형식적 특징은 쉽게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소재에 있어서는 늪과 숲을 주로 다루는 풍경화고, 색채는 확실하게 단색이라 할 수 없지만 시각적으로 단색조의 느낌이 강하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보면, 시선의 문제다. 화면 가득 꽉 찬 풍경은 거대한 자연의 모습인 것으로 기억 속에 먼저 각인되지만, 사실 풍경을 바라보는 시선은 공간에 매우 가깝게 밀착해 있다. 심지어 시선의 초점은 예외 없이 풍경의 어느 한군데로 급격하게 수렴되곤 한다. 말하자면 이미 관념처럼 자리 잡은 자연의 풍경이 진부한 이미지로 전락해 버리는 것은 자연에 몰입하는 순간 못지않게 아주 흔한 일인데, 윤예제의 회화는 바로 그 경계에서 또 다른 시각의 경험을 제시한다.

 

예컨대 캔버스의 가로와 세로의 길이가 각각 7m와 2m를 넘는 <어스름 속_숲>(2016)은 그러한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최근의 작업이다. 돌과 풀, 그리고 이파리 없는 나무들로 빽빽하게 채워진 이 풍경은, 거대한 숲의 “내부”를 들춰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거대하게 펼쳐있는 자연의 풍경”이라는 쉬운 수사를 단번에 폐기처분 하듯, 윤예제의 회화는 풍경 전체로 관람의 시선을 유도하지 않고 더 깊은 내부-그가 “심연”, “품”, “속”이라는 단어로 지시한 장소-로 집요하게 파고든다. 때문에 (화면의 물리적인 크기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크기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밀폐된 이 내부의 공간은 거리두기가 불가능한 채 현실의 맥락에서 벗어나 하나의 강박적인 장면들을 연상시키면서, 흔히 말하는 일련의 꿈 혹은 기억의 파편들과 연루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지난 개인전 《어스름 속 In the dusk》(2016)의 설치 방식으로 더욱 극대화되었는데, 어두운 풍경에 둘러싸여 하나의 장면에 계속해서 응시할 수밖에 없는 관람자의 기이한 경험은 작가가 그 실제의 풍경에서 불현듯 마주한 어떤 감각과 중첩된다.

 

한편 회화의 틀 안에서 시선이 이동하는 초점을 만들어 놓고 그 안으로 수렴해 들어가는 응시의 구조를 살펴왔던 윤예제는, 이번 전시 《어스름 속》에서는 전시 공간을 활용해 실제의 공간에서 그 경험을 구체화했다. 그는 한 벽을 가득 메운 풍경에서 한 부분을 도려내 동시에 그것을 3차원적 공간으로 환원시켜놓았다. 다시 말해, 그는 그동안 “심연”, “품”, “속”으로 지칭해왔던 풍경 내부의 구조를 공간의 차원으로 어떻게든 드러내고 싶었던 거다. 그는 유독 풍경 내부에 기생하며 모호한 경계를 만들어내고 있는 작은 구멍이나 혹은 시각적/심리적 혼란을 야기하는 파열의 흔적들에 시선을 둬왔다. 모호한 경계, 그것은 단일한 풍경을 일순간에 흔들어 놓을 정도로 수수께끼 같은 불순함을 내포하고 있는 구조다. 윤예제는 그 불순한 형태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것은 풍경 바깥에서는 도무지 접근 불가능한, 매우 내밀한 시선이다.

 

현실의, 낯선 시공간에 대한 기록

 

거슬러 올라가보면, 윤예제가 회화의 대상으로 끈질지게 탐구했던 것은 풍경 그 자체라기보다는 폐쇄된 공간에 대한 추상적 사유였다. 전시에서는 소개된 적 없지만, 그가 아주 초기에 제작했던 회화 연작들은 일상의 공간에서 폐쇄되고 고립된 (낯선) 상황을 찾아내 일련의 연출을 통해 등장인물들-자신 혹은 주변 인물들로 특정된-을 상황 속에 고립시켜놓았다. 현실의 익숙한 공간이긴 하나, 의도적으로 장소성의 맥락에서 벗어나 있는 임의의 욕조나 호수 혹은 물웅덩이를 공간적 배경으로 설정해 그 폐쇄된 공간이 함축하는 현실과 현실 너머의 뒤섞인 경계를 환기시켰다. 이는 마치 현실에 생겨난 작은 틈새나 파열처럼, 현실 너머의 공간에 대한 초현실적 상상을 부추긴다. 갑작스럽게 마주하는 낯선 공간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낯선 상상은 현실에서 (응시에 길들여지지 않음으로 인해) “불안”을 일으키는 연결고리를 함축하게 마련이다. 윤예제는 익숙한 풍경이 하나의 스크린처럼 강력하게 봉인하고 있는, 그래서 현실의 응시에 결코 포획될 수 없는 현실 너머의 장소를 상상하며 매번 이렇게 현실의 낯선 시공을 서성인다.

 

과거의 초현실주의자들의 수법이 그러했듯이, 윤예제는 이 현실의 풍경을 매우 심리적인 장면으로 재구성하면서 이 풍경이 함축하는 매우 강박적인 기제를 극대화하려 했다. 윤예제는 유독 둥근 형태의 공간에 대한 시각적 충동을 일으키며, 그러한 공간 구조를 함축한 풍경을 기록해왔다. 일련의 프레임 안에 선택된 현실의 풍경은, 다시 작가의 낯선 마술적 상상에 의해 변형되고 그렇게 변형된 이미지는 강박적인 반복 행위에 의해 마치 무의식에 의한 자동기술적 회화처럼 구축돼 왔다. 때문에 윤예제의 그림은 사실적 풍경이 과시하는 비현실적 강박이 화면을 이중적으로 장악한 셈이다. 윤예제는 그것이 바로 우리가 풍경을 보는 방식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풍경을 보는 것은 풍경을 지각하는 것으로 대체되고, 그 말은 다시, 풍경의 실체를 애초에 볼 수 없음이라는 결핍이 그 시공에 대한 대체물을 강박적으로 기록하려는 행위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앞서 말한 대로 윤예제의 회화는 사실적인 묘사와 심리적인 표상이 교묘하게 충돌하는 지점을 연출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초기 작업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꽤 일관성 있게 회화의 대상을 통해 일련의 흐름과 변화를 모색해 왔다. 최근 윤예제는 풍경이라기보다 공간의 구조가 함축하는 심리적이고 시적인 사유를 지속해 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추상적인 사유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이게도 그의 그리기 행위와 그리는 대상, 그리고 그려진 형태에 깊이 연루돼 있다. 때문에 그 간극에서 현실의 낯선 풍경을 기록하는 작가 특유의 예민한 시선과 감각이 번번이 도전받게 마련이다.

Documentary of the unrealistic landscape

implied in a realistic existence

Yoon, Ye-je | Cheungju Art Studio Workshop

Ahn, So-yeon (Art Critic)

 

 Yoon, Ye-je’s painting that has particularly contained the landscape of swamps and forests with a monotone on canvas creates a spot where a realistic depiction and a psychological representation collide delicately. This can be inferred at a glance from her previous exhibition titles such as 《Forest of Abyss》(2013), 《Deep Bosom》(2015), and 《In the Dusk》(2016). Although it sounds paradoxical, the artist is deeply immersed in a realistic form as a psychological representation implied in a certain landscape. Thus she puts hard efforts into every stroke of a brush to depict this on canvas. That’s why her dense monotone painting seems to record the general looks of swamps or forests without any strong reference to a specific place, all at the same time arousing enigmatic magical imagination hidden in such an ordinary landscape. In this wise, Yoon, Ye-je’s “landscape” painting is quite ambivalent, especially in the artist’s gaze approaching a real landscape and in the way of experiencing time and space as the object of this gaze. Also the unrealistic emotion emerging from a realistic expression has created a mysterious irony.

 

Another gaze of an Insider toward landscapes

 

When we look at Yoon, Ye-je’s painting, its formal characteristics can be promptly summarized into some points. With regard to the subject, it is mostly a landscape painting of swamps and forests, and its color gives a strong impression of monotone, while it is not technically one single color. To add one more element, the question of gaze can be mentioned. Although a landscape filling the entire canvas is firstly perceived in viewer’s memory as a big, distant nature, the artist’s gaze at landscape is in fact very close to that space. Even the focus of this gaze is rapidly converging at one particular point of the landscape in every piece. In other words, it is actually very common that a natural scenery acquires no more meaning than a banal image fixed in our mind, as well as the instant attraction we would easily get from the nature. But Yoon Ye-je’s painting suggests an experience of another gaze, on this very frontier.

 

For example, <In the dusk_Forest>(2016) drawn on a canvas over 7m wide x 2m high is one of the recent works that express such an attribute. This landscape densely filled with stones, grasses and leafless trees exposes the “inner part” of a giant forest. Yoon, Ye-je’s painting tenaciously digs down into the deeper inside (a place she calls “abyss”, “bosom”, and “core”) without attracting the audience’s gaze at the overall landscape, as if she discards decisively the easy rhetoric of “giantly unfolded natural scenery”. That’s why the space of this inside seems to be confined so close that it is impossible to guess the exact size (despite the physical size of canvas itself), and this space, that are impossible to distantiate, brings to mind some obsessive scenes, getting out of the context of reality, tangled with a series of dreams or fragments of memory. This is maximized thanks to the installation method of 《In the dusk》(2016) : the audience have to face one scene and to keep staring at it. This curious experience overlaps the artist’s own sensorial experience of the moment when she faced to the real landscape.

 

On the other hand, Yoon, Ye-je, who created a focus of the gaze moving within a frame and observed the structure of the gaze converging inside, embodied the experience in a real space, using the space of this exhibition 《In the dusk》(2016). She cut a part of the landscape covering one entire surface of the wall and restored it into a three-dimensional space. In other words, the artist wanted to show the structure of the inner scenery called “abyss”, “bosom” and “core” by means of three-dimensional tools. She has observed especially small holes which parasitize inside of the landscape making ambiguous boundaries, and the traces of ruptures that cause visual/psychological confusion. Ambiguous boundary, it is a structure containing impurity, mysterious enough to shake a homogeneous landscape in a moment. Yoon, Ye-je focuses on that form of impurity. And that is the very inner gaze, inaccessible from outside the landscape.

 

Record of strange time & space of reality

 

To trace back, what Yoon, Ye-je has tenaciously explored as an object of painting is the abstract thought about the closed space, rather than the landscape itself. Although it has never been presented in exhibitions, the artist’s very early painting series tried to isolate characters (herself or specified people around her) into a certain situation through a series of mise-en-scene, finding out a closed and isolated (unfamiliar) situation in a daily space. It is a familiar space in reality, but put intentionally out of the context of sense of place, such as a random bathtub, lake, or puddle. This kind of space is set as a spatial background so as to stir up the confused boundaries of reality and beyond-reality, implied by that closed space. It encourages surrealistic imagination about the space beyond reality, like a small crack or a rupture existing in reality. The strange space faced suddenly and the strange imagination aroused by that space is about to imply the link causing “anxiety” in reality (because it is not tamed by the gaze). So, Yoon, Ye-je is wandering around the strange time and space of reality every time in this way, imagining a place beyond reality that is strongly sealed by familiar landscapes like a screen, and that is therefore never be able to be captured by the gaze at reality.

 

As surrealists’ technique used to be, Yoon, Ye-je tries to maximize a very oppressive mechanism that this landscape implies, by reconstructing this real landscape into a very psychological scene. Yoon, Ye-je has particularly recorded landscapes that imply round-shaped spatial structure, as she feels a strong visual impulse on this type of space. The landscape of reality selected in a series of frames is transformed again by the artist’s strange magical imagination, and the transformed image has been built like automatistic painting from unconsciousness. Therefore, unrealistic obsession demonstrated by the realistic landscape in Yoon’s painting seems to seize the canvas ambivalently. Yoon, Ye-je said that it is very similar to the way of our viewing a landscape. Looking at a landscape is replaced by perceiving a landscape. In other words, a intrinsic deficiency of being unable to look at the true nature of a landscape is exposed as an act to obsessively record the substitute of the very time and space.

 

In this regard, Yoon’s painting creates a spot where a realistic depiction and a psychological representation collide delicately, as stated above. And, the artist has sought for a series of flows and changes quite consistently from her early works to the present. Recently, the artist continues psychological and poetic thought that the structure of space implies, rather than a landscape. But, even though it is very abstract thought, it is paradoxically deeply involved with her act of painting, object to paint, and the drawn form. That’s why the artist’s own acute gaze and sense that records unfamiliar landscapes of reality in this very gap is always challenged.

심경(心境)이 있는 자연(自然)과 사랑의 아우라(aura)

유 종 인 (시인,미술평론) 

 

1. 

여기 소소한 자연의 풍경에서 존재의 심연을 보아내는 도저한 풍경주의자(風景主義者)가 있다. 누구도 잘 눈여겨 보질 않는 일상적 풍경의 한 대목에서 실존(existence)의 감정과 품성(品性)을 유추해내는 젊은 화인(畵人)이 있다. 일반적으로 여느 자연에 부여하는 고루하고 범박한 산수적(山水的) 풍경 해석에서 비켜나 자기만의 안목으로 풍경의 속내를 들여다보듯 그려나가는 윤예제의 심리적 풍경 이해는 골똘하고 신선하다. 풍경에도 소위 겉(The Appearance) 풍경과 속(The Bottom) 풍경이 있다. 그녀는 그 풍경의 겉과 속, 그 표리(表裏)를 하나로 결속하는 심미적인 결단으로 대다수가 외면한 풍경의 속내를 냅뜰성있게 화폭에 안칠 줄 안다. 

절경(絶景)이나 명승(名勝)이 아닌 현장의 무심하게 지나치는 지점이나 대목, 그 풍경의 여줄가리에 오히려 본원적인 응시(凝視)의 끌림을 부여하고 내면을 선사하는 화폭이 선득하니 자자하다. 그것은 경험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선험적(先驗的)인 구석이 자자하다. 마치 그의 풍경들은 처음인데도 불구하고 다음 순간 데자부(deja vu)의 영역, 그 기시감(旣視感)의 분위기로 은근히 보는 이의 마음에 새뜻하고 소슬한 내면의 벌물이 번지게 한다. 그것은 풍경을 외물(外物)이나 단순히 경치(景致)의 완상적(玩賞的) 차원을 넘어 내면(內面)에 드리우는 또 다른 심경(心境)으로 보아내는 미적 가리사니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윤예제는 분명 풍경의 일상을 통해 일상적 풍경이 감추거나 드리우고 있는 심정적 아우라(aura)를 직감적으로 혹은 직관적으로 보아내는 눈썰미가 있다. 그리고 그런 얼얼한 영혼의 감각이 내민 팔래트에 붓끝을 찍어 여실히 풀어낸다. 그래서 그의 풍경들은 먼저 이해되는 그림이 아니라 나중에 이해되고 현재는 깊이 느껴져야 할 그림이다. 어떤 막연한 데자부의 감각은 선험적(先驗的)인 것이지만 그녀가 말한 '품'의 이미지들은 인간의 영혼이 이해하는 어떤 품성이나 깊이를 추체험하게 하는 묘한 뉘앙스를 품어낸다.

겨울에서 봄으로, 그는 어슬한 현장 속에 초목(草木)들이 가지런히 스러지고, 서로 엇갈리고, 고민하듯 기대고, 연좌하듯 잇대인 산야(山野)나 늪지대의 어눌하고 소슬한 분위기에서 보다 근원적인 정서(情抒)를 건네받는다. 마치 샤먼(shaman)이 망아(忘我) 상태에서 어떤 초자연적인 계시를 받듯이 화가는 풍경이 지닌 소슬한 분위기나 사소한 기미(機微)에서도 예전에 없던 초자아(超自我)적인 영성(靈性)의 분위기를 감지할 줄 안다. 그것은 대단히 특별한 사람만이 접할 수 있는 교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도시화와 천민자본주의의 그늘 속에서 잃어왔던 본래적 감수성의 일종으로 봐도 좋으리라. 그런데 윤예제는 그런 자연과의 교감능력을 하나도 훼손하지 않은 채 어딘가 낯설고 때론 쓸쓸하고 소슬한 형태로 우리 앞에 자연의 한 얼굴을 복원시켜주기에 이르렀다. 윤예제는 그런 현장이 왠지 쓸쓸하지만은 않고 따뜻하다고까지 한다. 여기에 윤예제의 또 다른 감수성의 원천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자연을 외상(外相)이 아니라 인간의 실존적 깊이와의 연결고리로 보고 있다는 감수성의 측면이다. 기후에 따른 변화하는 자연 현장을 웅숭깊게 보는 그 직관적인 감각은 결국 실존적 인간이 지닌 심정적 결여(缺如)와 관계된 모색의 풍경과 조우함을 보여준다. 사람에게서 다 찾을 수 없는 어떤 본원적인 심성을 현장의 자연 속에서 실감있게 공여받고 있다는 증거가 그녀의 화폭에 적나라하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인간에 대한 비관주의가 아니라 결락됐던 자연과 인간의 근원적인 연대를 모색하는 일종의 공생적(共生的) 자연주의 경향이 낳은 이미지가 아닐까 싶다. 자연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 기존에 있던 것을 배척하는 행태를 보이지는 않는다. 그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만상(萬像)들을 공생(共生), 공유(共有)하는 형태로 무한한 관계를 열어놓는다. 그러기에 자연에는 세속의 사리분별이나 시비곡직(是非曲直)이 의미있게 작용하지 않는다. 현상으로서의 자연은 인간의 가치를 뛰어넘는 무위(無爲)의 도(道)에 부합한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감성에 부합하는 무명(無名)의 자연에서 자기만의 유명(有名)의 자연을 보아내는 기질을 지녔다.

풍경은 그 풍경이 아름답다거나 추하다는 일반적인 경험이나 가치판단으로부터 이미 그 풍경을 놓치는 경우가 있다. 화가는 풍경을 미추(美醜)의 관념이 아니라 마음이 닿거나 열리고 위무되는 또 다른 심연으로 볼 때가 더 소슬하고 오롯했고 절실했을 터이다.

 

2.

 도시적 사물이나 자본에 홀린 자와 삶 저변의 자연풍경에 홀린 자의 황홀(恍惚)의 정도와 깊이, 그리고 그 지속성은 분명 차이가 있다. 문명적 관심은 자본이 만든 세속적 쾌락의 기획 속에서만 가능하게 조작되고 제어돼 있지만, 자연 풍광의 소소하고 또 독특한 분위기는 보다 근원적인 심성과 정서적 끌림 속에 영혼을 안치고 그 심정을 다양하게 번져낸다. 그 번짐은 확장하는 정신으로 변주될 본원적인 힘을 갖는다.

 그런 의미에서 윤예제는 사물이 갖는 정태적(情態的)인 인상을 있는 그대로 사실적인 맥락에서 화폭에 옮김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의 인상적 끌림의 정서반응을 거쳐 일종의 데포르마시옹( Deformation)의 효과를 창출하곤 한다. 그것이 의도적 기법상의 왜곡이든 의도와 상관없는 자기몰입의 결과이든 상관없이 그에겐 나름의 효과적인 분위기의 추수가 아닐 수 없다. 이는 곧 그가 대상 풍경과 교감하는 남다른 몰입의 상태에 누구보다 두드러진 자세를 견지한 작가임을 예견하는 대목이다. 작가의 말처럼 남들은 심상하고 때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의 현장이 자신에겐 편안하고 심원한 영감(illusion)의 장소로 끌린다는 말은 자연 대상과 교감하는 그의 남다른 교감을 담보하는 언술이 아닐 수 없다. 그의 그림들이 사실적 구상(具象)에 집중하면서도 추상적 뉘앙스를 드러내는 것은 바로 이런 영감(靈感)의 서술에 끌리는 붓놀림이 도저하기 때문이다. 화폭 속의 풍경에는 별다른 장치적인 혹은 의도적인 오브제(objet)를 극도로 배제하는 것도 화가가 대상 풍경과의 충분하고 심원한 교감이 선행된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적 뉘앙스만으로도 그것은 이미 넉넉히 대상과의 섭외가 진행되었다는 조짐이자 징후다. 외향적인 역동성의 이미지가 가라앉은 반면에 화가 자신이 정중동(靜中動)의 정서적 소요(逍遙)를 통해 이미 풍경의 내면(內面)과 서서히 갈마들고 소슬하게 번져내는데 자연스럽다. 풍경을 단순히 자연친화적인 것 이상의 영혼의 결(texture)로 환치하는 이런 일련의 작업은 파격의 이미지 조합과 색출에 열중하는 선정적인 작금의 일부 미술 경향과는 류(類)를 달리한다. 그는 서양화의 표현적 기법 속에 동양화의 화의(畵意)을 결합하는 화가다.  

 

3.

 윤예제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것이 분명 늪가의 초본(草本)을 묘사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느낌으로 자연스럽게 전이되는 소슬한 경험을 갖는다. 가량 그것이 풀들의 모임이 아니라 일종의 파도라든가 마음 속에 품고 있던 너른 둥지 같은 이미지(image)로 전이되는 감각말이다. 또 그것은 보는 이의 감성적 편차에 따라 다른 색다른 이미지로 확장될 가능성을 종종 보여준다. 지극한 사실성의 포착 속에 깃든 이런 일루션(illusion)은 그의 그림이 재현의 동기보다는 화가의 심정적 발현의 동기에 더 기울어 있음을 보여준다. 동양화론(東洋畵論)의 관점에서 보면 화의(畵意)에 경도된 경물(景物)인식이 두드러져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화가의 태도와 상통한다.

그것은 애초에 화가가 사실적으로 포착하고 감성적으로 특화한 대상 자체가 심리적(心理的) 요소와 심미적(審美的) 인상을 하나로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구상적(具像的)인 추상성(抽象性)이 얼비친다. 반대로 추상적인 구상미(具象美)로 보더라도 앞서 말한 부분과 두동지지 않는다. 이런 아이러니는 풍경을 단순한 외물(外物)이나 외경(外景)의 차원이 아닌 심정적 절실함이 갈마드는 주관적인 풍물로 소화해내려는 작가의 지극한 응시(凝視)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해 보인다. 일찍이 중국의 현대 화인(畵人) 중 하나인 이가염(李可染)은 ‘산수화란 지리책이 아니다. ...이른바 경물(景物)을 보고 정을 느끼는 것이며, 경치를 그린다 함은 정(情)을 그려내는 것으로 사물을 빌미로 정을 기탁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윤예제의 풍경들은 현대 동양화적 관념으로 보면 비록 서양화의 본위(本位)가 완연하지만 선(線)과 점(點)과 면(面)의 자연스런 융합과 조화가 풍미되는 동양화적 분위기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그녀의 화면속 풀들이 지닌 원초적인 선묘(線描)는 현장의 풍경을 거의 장악하다시피 하며 그녀가 풍경에서 받은 심정의 아우라를 대변하는 인상적 패턴(pattern)이나 심미적 질감(texture)을 소요하듯 옹립하는 정감이 감돈다. 세필(細筆)을 통한 촘촘한 초본류(草本類)의 가만히 잇대고 서로 얼크러지고 기대인 풀들의 기후적 생태는, 그것이 심정을 이끄는 한 징후적 뉘앙스로 받아들이는 화가의 눈에 의해 영혼의 생태로 전환되는 모색의 상관물이 된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그녀의 화폭엔 그간 짙은 회색 톤의 무채색이 주조였던 풍경에 화사한 화염처럼 연분홍이 번지듯 피어나고 있다. 지상에선 듯 낮은 천상에선 듯 그것은 꽃보다 오래 개화하고 잎보다 질기게 흔들리며 열매보다 오래 매달린 채 자연의 생기(生氣)와 장차 다가올 소멸조차 낙락하게 받아안을 기세다. 그것은 극명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주 사실적인 본색(本色)을 드러낼 기미나 숨탄것으로서의 무한한 변화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만큼 윤예제가 그리는 자연의 인상은 모호하면서도 구체적인 심경(心境)으로서의 자연이다. 이 찬란하고 소슬한 그로테스크 속에서도 그녀는 안온한 정념을 구축할 줄 아는 힘과 자기 눈을 가지려 한다. 남들은 쉽게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아내는 이 밝음의 눈을 가지고서 그녀가 궁극적으로 그리려는 자연의 섬세한 윤곽은 범벅하게 말해 사랑의 아우라다. 

 지금도 그렇고 항차 사랑을 위한 방황과 모색의 자연이 아니라면 그것은 세상이 모두 사랑이라 부르더라도 그녀에겐 사랑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려지는 풍경이 아니라 그렇게 그려질 수밖에 없는 어떤 절박한 자연의 심정을 그녀는 사랑의 근사치라 부르며 그리게 될 것이다. 품이 있는 그 사랑의 근사치(近似値)를 영혼이 호흡하는 사랑의 절대치(絶對値)로 가기 위한 지난하지만 기꺼운 붓-터치는 쉬 멈추지 않을 것이다. 자연을 모르는 사랑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예견하듯 윤예제의 이번 그림들은 하나의 배경과 중심이 너나들이하는 풍경을 통해 독특하고 서늘한 존재의 심연을 불러내고 있다. 

 

 

 

 

 

심리적 서사의 적요한 풍경



유 근 오 (미술평론)  

 화면을 본다. 보면서도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생각, 아니 눈에 보이는 것은 잘 드러나 있는듯하지만 기실 허상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보이는 것의 이면을, 경우에 따라 저쪽(피안)을 엿보고자 한다. 우리가 소설을 읽을 때 활자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활자의 이면을 추적하여 거기에 숨은 의미를 찾듯이, 그림에서도 화면의 표층보다는 그 이면의 어떤 것에 집중하게 된다. 그래서 하이데거도 작품은 ‘사물 너머의 그 무엇’이라 했으리라. 그러나 한편으로 눈에 보이는 것의 이면을 추적하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 이면에서조차 의미는 흩어지고 사라져 버린다. 설사 그 이면을 추적하여 어떤 의미를 가까스로 독해한다 해도 이런 해석과 무관한 여타 의미들이 여전히 살아 움직이며 우리의 각막과 대뇌피질을 뒤흔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몇몇 작품은 스스로 작동하여 감상자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때론 속삭이고, 때론 현혹하고, 때론 감상자의 안목을 비웃기도 한다. 하나의 그림은 이처럼 다양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윤예제 그림의 표정이 그렇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의 그림이 절기마다 모습이 변하는 전형적인 풍경화가 아니라는 점이다.
 

 

 풍경은 외재하는 공간의 표상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작가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나 관계 맺는 시각체계와 연결된다는 것이 기지의 사실이다. 각기 다른 고유한 시각체계에 따라 세계는 단지 생태적, 환경적, 사회적 함의, 즉 중성적인 공간에만 머물지 않고 파생적 실재로 물화되면서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는 매개적 공간으로 간주된다. 이런 자율성은 때론 풍경이 과도한 파토스가 실린 대상물이 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어떻든 풍경에 오버랩 되는 시적 상상력으로 갈무리된 윤예제의 회화는 단순한 시각의 범위를 넘어서는 내면의 감수성과 실제 세계의 풍광이 혼용되는 방식으로 구현되고 있다. 그러나 작가에 의해 직조되는 이런 회화적 구조는 풍경 그 자체에 무게 중심을 둔다기보다는 시적 지표에 더 가까운 모습이다. 풍경 그 자체에 무게를 두기에는 자연풍경 고유의 색채가 너무 탈색되어 회색조에 가깝고, 한편으로 작품의 명제로서 ‘July nightmares', 'Returned my winter', 'My December' 등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작품이 자연을 자아의 거울로 전치시켜 작가의 내면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음을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이렇듯 그의 화면은 내면의 자국을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심상의 흔적이 노골적으로 이미지의 주제로 전면에 드러나지는 않는다. 이는 작품에 접근하는 작가 고유의 방법론에 기인하는 것 같다. 주제를 너무 적극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은 작가의 내면과 일상의 풍경이 맺고 있는 적요의 평화가 깨지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지근한 자연대상을 관조하며 충실하게 묘사만 한다는 것 또한 내밀한 풍경이 아니며, 심리적 풍경의 진정성은 작가의 몸과 마음에 있는 감각의 구현에 있음을 윤예제는 보여 주고자 함이다. 그래서 아마도 작가는 숲 사이를 떠돌며 딱히 통속적인 풍경이라고도 할 수 없고, 딱히 작가 혼자 내면에서 자신과 나누는 고독한 독백의 내러티브라고도 할 수 없는 경계의 화면을 전개하는 것이리라 사려 된다. 이런 방식은 굳이 절충적이거나 초감각적이 아니더라도 분명 그의 자연풍경이 단지 망막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 어디엔가 있다는 것을 현시하는 것이다.
 

 

 윤예제가 자연의 풍경, 혹은 외재하는 공간을 다루는 방식은 독특하다. 그에게 자연은 눈이라는 감각기관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직접 체득하는 대상이다. 까닭에 그의 작품은 풍경에 밀착한 듯한 거리감 없는 시선을 화면에 반영하고 있다. 일견 화면에서 잡초와 작은 나무들로 빽빽이 채워진 숲이 먼저 눈에 들어오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여러 층위의 의미를 갖는 하늘의 부재와 물의 상징성이 아닌가 싶다. 우선 화면에서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작가가 주변의 환경을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 풍경 속에 몸으로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표면에 밀착하여 벌이는 몸부림의 시각에는 하늘이 절실하게 필요치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작가는 관조가 아닌 몸으로 세계와 부딪치며 느낀 체험을 화면에 옮겼다는 말이 된다. 이는 풍경과 작가의 내재적 관계항을 몸을 통해서 체현하려는 의지에 다름 아니다. 조금 비틀어 말하자면 작가가 자연대상을 바라보며 그린 것이 아니라 그 속을 직접 거닐며 화면을 완성한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직접 덤불과 습지를 헤치면서 체험한 구체적 풍경을 펼치듯, 작가는 화면의 얇은 표피 위에 풀꽃 하나하나, 나뭇가지 하나하나, 잎사귀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묘사하며 모노톤의 색감으로 정착시켜 의외로 몽환적인 분위기를 극대화 시킨다. 요컨대 그것은 실재하는 풍경이기도 하지만 작가의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던) 심상이 삼투된 심리적 풍경이기도 하다. 언뜻 보면 화면의 시간대가 불분명하긴 하지만 화면은 백야(白夜)의 박명(薄明)처럼 음울한 회색조나 감미로운 단색조의 파노라마로 마감된 경우가 대다수다. 화면을 가득채운 우거진 덤불과 들꽃과 초록빛 나무의 풍요로움에도 불구하고 그림의 정조는 적막하고 쓸쓸하기조차 하다. 몸으로 부딪친다고는 했지만 거기에는 어떤 동요도 일지 않고 혼란 없는 정돈의 상태를 나타낸다. 이 파노라마에서 시간은 천천히 흘러가고 대기는 부드럽게 변화하며 서서히 움직인다. 

 

 윤예제 작품의 또 다른 특성은 화면 곳곳에서 시냇물이든, 개울물이든, 웅덩이에 고인 물이든 물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은 미결정상태로 부유하지만 헤아릴 수 없는 의미들의 가능태이다. ‘형태 없는 형태의 정체성’은 종종 여백을 지시하기도 하지만 물이라는 물질의 본성이기도 하다. 윤예제에게 물은 은자의 명경(明鏡)으로 시적 감성의 은유이며 흐릿하고 몽상적인 분위기의 상징성을 승화시키는 장치로도 여겨진다. 나아가 물은 매우 다양한 상징성을 표상하지만 마찬가지로 모순등가성(矛盾等價性)을 내포하기도 한다. 예컨대 물은 생명의 근원이자 죽음이며, 맑음이자 재생이고, 순리이자 역경이며, 풍요이자 차가움이고, 정화이자 순환이며, 양인 불에 견주어 음으로서 달이자 밤이기도 하다. 이런 물 이미지의 다양한 변용은 화면에서 물이 환기시키는 소리와 차가움과 청량감 등을 경험하는 공감각적 효과를 유발하기도 한다. 또한 통상 물과 꿈의 긴밀한 관계와 유기적 결합은 윤예제의 작품에 액화된 꿈의 세계라는 독특한 심미적 공간을 창조하면서 작품의 서사 구조를 결정하는데 있어서도 근원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특히 이런 뉘앙스와 맞물려 시선을 포박하는 듯이 치밀한 밀도와 세기로 그려진 서정적 풍경은 인간 사회의 비속과는 전혀 무관한 모양새를 하고 있지만 실은 작가의 시선에 의해 연결되어 있는 서사적 세계이기도 하다. 이 시선은 종종 물속에 잠겨 달콤한 오수 혹은 고독을 즐기는 듯한 인간(작가 자신)이나 신체의 일부를 그 풍경 속에 등장시킴으로서 서정에 서사를 끌어들이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자전적 풍경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이런 방법론을 통하여 그의 그림이 시적 풍경을 넘어 초현실적인 차경(差境)의 효과를 이끌어 내고 있음이다. 따라서 우리가 현실이자 꿈같은 화면, 즉 모노톤의 친숙하면서도 낯선 양가적인 풍경과 맞닥뜨리는 것은 당연하다. 결국 우리는 재현의 풍경에서 벗어나 나로 향하는 나르시시즘의 발현인 작가 개인의 내러티브와 시적 상상력에 기반을 둔 서정/서사의 지평이 교호하는 화면을 목도하는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작가는 화면에 재현된 풍경으로 지리적, 물리적, 사회문화적 텍스트를 함의하는 특정한 장소나 풍경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우리가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대상이고,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주변 풍경이며, 어떤 벅찬 감동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덤덤하고 소소한 일상의 장소이다. 실상 이 풍경들은 작가의 작업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개천가에서 체득한 것들이다. 여기서 무엇보다 윤예제의 그림이 특별한 것은 일상의 풍경을 전이 하여 환상을 체현해 감동을 자아내게 하는 작가의 재능에 있다. 이 모든 것은 작가의 손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맨 끝에는 신비스런 언어 ‘적요’가 흐른다.

 


 윤예제의 그림은 기존 풍경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작가 고유의 마음 상태, 정신적 자유의 비상을 꿈꾸는 매개체이다. 그 비상은 통상적인 인식과는 달리 풍경이 단지 자연에 대한 색다른 표현의 세계가 아니라 눈에 단순히 포착되는 세계를 비우고, 그 세계를 넘어 조우하는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작품에 있어서 초월적 비움의 행위는 무위이든, 물아일체이든 궁극적으로 이를 통해 자기성찰의 기회를 경험하는 것이다. 나아가 객관과 관조의 시점을 넘어 내면의 심연으로 침잠하다 이윽고 몸으로 체화되어 자연과 일치돼 그대로 자연이 되고 마는 그런 경지이다. 물론 이런 경지에 다다른다는 것이 그리 용이한 일은 아니다. 윤예제가 이런 경지에 도달했는지 못했는지는 차치하고라도 그의 그림, 즉 적요한 풍경을 통해 감상자로 하여금 동공이 떨리는 감각적 울림의 경험을 발생시키고자 한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몸, 밀착, 고요, 은현, 몽환, 내러티브, 시적 상상력, 이 모든 것들이 윤예제의 풍경 속 어디에 위치하는지 간파하는 것도 그림읽기의 묘미에 속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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